역사는 한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허영철 2006년
허영철은 1920년 전북 부안군 보안면 성동에서 태어나 10대 후반부터 유바리탄광, 경흥탄광, 함경도 철로현장, 단양지역 사방공사 등 거친 노동으로 이웃, 토지, 농촌, 국가, 세계를 학습한다. 8.15 해방 후에는 미군 및 일제 잔당에 의해 지리멸렬하던 부안지역 인민위원회의 재건을 위해 생과 사의 갈림길을 넘나들며, 1950년 7~8월까지는 부안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 후 당의 명령에 따라 서울, 만주, 평양 등의 각급 당학교에서 정치학습 후 1953년 남파된다. 충남 웅천에서 기반을 다지던 중 뜻하지 않게 피체되어 1991년 2월 25일까지 홍성, 대전, 전주, 공주형무소에서 만 36년간을 복역한 후 출소한다. 90년대에는 70대의 고령임에도 생계를 위해 논밭에서 품을 팔고 부안 진성아파트, 김제시영아파트에서 경비원을 하였으며 이후에도 이웃의 희노애락에 공감하며 지역의 크고 작은 모순에 아파하며 2010년 향년 90세로 사망한다.
6.25의 참상을 남긴 책으로 4년전 김성칠의 ‘역사앞에서’와 이번에 허영철의 ‘역사는 한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읽었다.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는 1950년 7~9월까지 3개월의 서울시내 인공치하에서 하루하루의 공습상황, 비참했던 이웃의 생활상을 일기로 남긴 기록이다. 이 책 ‘역사는 한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는 허영철의 자전적 기록, 편집자와의 장시간에 걸친 마주이야기, 각종 공판기록 및 옥중서신, 현대사의 주요사건에 대한 남과 북의 정의 등을 엮은 현대사를 관조하는 부안적인 기록이다. 중앙적 기록, 그리고 공인된 기록에 인이 백힌 나는, 4년전에 이어, ‘역사는 한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읽고서 온몸에 찌든 관제독을 빼 낸다.
허영철은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묻는 질문에 당시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는 구호로 끊임없이 도발한 이승만, 그리고 미국과 국군의 쉼없는 국지전을 이야기하며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며 남침은 현상만을 놓고 본,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또한 해방 후 소미3상의 결정을 따라야함에도 미국은 소련의 후견제를 신탁으로 역이용하여 정국을 장악하려 했으며 당시 미국의 거수기인 UN을 끌어들여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강행하여 분단을 더욱 고착시켰다고 한다. 말미에서 역사는 중심에서 비껴서 변두리에서 관조해야 핵심을 관통헐 수 있다고 말한다. 그곳은 무한한 창조와 다양한 그림자가 뒤엉켜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며...
예수의 산상수훈에는 가난한사람, 굶주린사람, 슬퍼하는사람, 겸손한사람, 평화를따르는사람, 박해받는사람 등 행복에 이르는 여덟 가지 길이 제시되었다. 허영철은 평생을 여덟 가지 길을 밟은 인물이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서, 만주에서 그리고 노년에는 이곳 부안에서, 김제에서 예수의 길을 걸은 성자이다.
본문 中
남쪽에서는 50년 당시를 인공때라고 하면서 먼 옛날 있던 역사적인 일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공주형무소는 죽은 사람이 나와도 보고하지 않고 죽은사람 몫의 밥까지 받아 먹을 정도였다.
출소하고 처음 집에 와서 살게 됐을 때 아내는 내가 방에 있으면 밖에서 서성거리며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인민이란 시대를 각성하는 사람이다.
혁명은 있는 그대로의 가죽을 손질한다는 의미다.
인민군은 鼓子다.
매일매일을 총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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