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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부안군(계화면) 이모저모

보천교 본소가 있는 곳 정읍 대흥리

 

보천교 본소가 있는 곳 정읍 대흥리

 


1번국도를 따라 정읍에서 장성방면으로 입암면 대흥리가 있다. 가녘에서 보면 여느 농촌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해 보이는 곳이나 일정시기 대흥리에는 경복궁을 방불케 하는 규모의 보천교 본소가 있었다. (현재는 일부 관리사를 제외하곤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보천교는 지금의 증산교, 대순진리회의 전신으로 교주 차경석(1880~1936)이 교단을 정비하여 1920년대부터 정읍 대흥리에 본소를 짓고 창시한 종교다. 동학이 급속하게 위축되고 일제하 고난한 삶이 이어지면서 농민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제시해 주면서 교세는 급속도로 확장되며 신자만 300만~600만명에 이르게 된다. (당시 조선의 총인구는 2,000만)


본당인 십일전은 궁궐 도편수에 의해 경복궁 근정전을 방불케 하는 규모로 지어진다. 모든 재목들은 개마고원에서 베어져 압록강 뗏목에 실려 인근 부안 줄포항으로 들여 온다. 보천교 본소가 들어선 이후 호남선 라인에서는 대전역 다음으로 여객이 붐볐던 곳이  대흥리의 관문인, 지금은 폐역된, 천원역이다. 이후 대흥리 보천교 본소는 전국의 신자들이 소달구지로 혹은 도보로 다녀가는 성지였으며, 아예 이주해 오는 신자들도 많았다. 특히 경상도 이주민이 많았으며 지금도 주민의 상당수는 경상도 출신이다. 보천교에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호남 지역의 돼지고기금이 들썩였으며 종각의 종소리는 인근 김제까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일제 말 ‘유사종교해산령’에 의해 강제해산되어 교세는 급속히 위축된다. 이후 본당인 십일전은 해체되어 조계사 대웅전으로 옮겨지고, 그밖에 주요 건물들도 내장사, 금산사 등 사찰로 옮겨간다. 본당의 거대한 종은 대동아전쟁시기 무기로 녹이기 위해 호남선에 실린다. (종은 화차 4대 크기였다.)

지금도 간간히 군산 앞바다를 비롯한 서해안상에서 고려청자가 인양되고 있다. 주민들은 이들 중 상당수 해중 유물들은 보천교 재산이 타지로 이동하면서 난파된 것으로 본다.


* 윗글은 대흥리 주민의 구술에 의한 것으로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대흥리 앞을 지나는 정읍천으로 동진강과 합류헌다.

 

 

 

본소 대문에 ‘보천교 본소’라고 적힌 낡고 바랜 현판이 걸려있을 뿐, 길거리 어디에도, 네비 어디에도 안내 표식은 없다.

 

 

 

 

웅장한 건물들은 죄다 뜯겨 나가 보천교를 상징할 만한, 눈에 띄는 가옥은 보이지 않는다.

 

 

 

 

흙벽을 시멘트로 개수했고 지붕은 기와가 아닌 강판으로 개량하였다.

 

 

물탱크건물였단다.

 

 

대흥리 본정통으로 여느 한산한 농촌과 다를 바 없다. 사진에는 없으나 바로 옆 전빵 평상에는 목하 이주노동자들의 막걸리 파티가 질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