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서울과 판박이인 1930년 경성의 어느날 (한국근대사산책 9권)
인물과 사상사 강준만
‘朝光’은 한성 여성의 4할은 매음녀가 아닌가 의심헌다. 개중엔 오랜 일본유학 후 돌아온 남편 옆의 신여성으로 인해 이혼을 강요당한 구여성도 있을 것이요, 결혼에 실패헌 10대 중반의 조혼여성도 있을 것이며, 파마넨트 웨이브로 한껏 멋을 부린, 버림 받은 첩들도 있었을 것이다. (1920년대 살인범의 50%는 여성일 정도로 조혼의 폐해가 심각했으며, 일종의 인두세인 축첩세까지 구상했을 정도로 심각했던 축첩의 관행은 60년대까지 이어진다)
0.01%의 신여성은 오엽주 미용실에서 전발이라 부르는 전기파마(一名 파마넨트 웨이브)를 한다. 조선의 여학생은 너무 부끄러울만치 얼골에 분을 쳐 바른다.
4대狂으로 금광, 미두광, 만주광, 잡지광을 꼽는데 이는 오늘날의 부동산, 주식, 미국, 인터넷으로 위상전이헌다. 전국 주요도시에는 영화관이 들어서며 최초로 ‘영상세대’란 말도 생겨났으며, 극장에는 임석경관이 항상 자리한다. 특히 무성영화는 변사가 애드립으로 대사하므로 임석경관은 한시도 감시의 고삐를 늦출 수 없다. 1910대 후반生은 3.1운동에 대한 기억이 전무하고 일본식 신교육으로 무장했으며, 수탈, 봉기, 억압보단 카페, 유성기, 단성사가 더 익숙한, 이른바 신세대로 구분 짓는다. 또한 3.1이후 ‘맹목적 연애야말로 진정한 연애다, 먼 소리냐 금수적 연애다’라는 세대간 대립이 있었다.
영화와 함께 가요도 등장허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곡으로 손목인이 20살 때인 1933년 작곡했다는 ‘목포의 눈물’ ‘짝사랑’등을 꼽을 수 있다. '요사이 가두의 점포에서 울려 나오는 유행가라는 걸 들어보면 어찌 귀를 씻고 싶은 생각을 금할쏘냐'란 사설을 보면 내가 요즘의 노래에 느끼는 감정과 흡사하다. 당시에도 비디오형 가수(김정구), 얼골없는 가수가 있다. 남인수 대 김정구의 대결구도도 흥밋거리다. 전성기 김정구는 한달에 집두채(1,000원)을 벌며 뭇여성이 선망헌다.
흑백사진속 이상의 하늘로 치솟은 헤아어스타이루는 내 헤어스타이루와 비슷하다. 이상은 종로구에 ‘69’라는 상호로 카페를 개업하는데 뒤늦게 이를 안 종로서에서는 대노한다. 당시 한성에만 카페가 1,000여개나 있었고 일부는 러시아 여성도 고용한다.
전북도내 최초의 백화점은 전풍도, 코아도 아닌 미나카이백화점 군산지점이었다. 채만식의 탁류에는 일대 포목점, 잡화점은 언급해도 백화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실제 확인이 필요한 지점이다. 오늘날의 신세계-이마트처럼 화신백화점-화신연쇄점의 구도가 있었다.
우면산 쓰나미로 약간 희석되겠지만 지금은 강남을 선망한다면 1920~30년대는 진고개를 선망하며 계급적 구별짓기의 총아는 피아노였다. 지금은 하도 많아서 특정짓기가 어렵다.
1940년 당시 전기 보급률은 조선인 10%, 일본인은 거의 100%이다. 1933년 최초로 경성 오사카를 연결하는 국제전화가 개통되었고 1939년에 이르러 50개국 100개 도시와 개통된다. 19세기 후반 런던 워싱턴간 전신통화허는데 무려 18시간이 걸린 것에 비하면 장족의 기술발전이다. 전화교환양은 할로걸이라 불린다. 시 전화가 폭주하여 “경기도청에 전화를 걸려면 만원전차를 기다리기보다 더 힘들어”란 푸념도 있다.
1936. 12월 아카스키(曉)열차는 서울 부산간을 6시간 45분에 주파했으며, 경성 피양간 3시간, 부산-북경간은 38시간에 달린다.
열차를 타고 원산해수욕장에 가면 ‘야, 저놈 하이칼라구나’ 한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1938년 박계주의 연애작 ‘순애보’에 묘사된 원사십리 해수욕장은 그 여느 해변보다 금빛 찬란한 곳이다.
과거 전라-경상간 지역감정은 양반이다. 당시 기호-서북간의 감정은 각종 친선경기마저 종종 피로 얼룩지게 했으며 해방공간에서는 지역감정을 넘어서 이념대립으로까지 치닫는다.
1932년 전국의 자동차 등록대수는4,800대로 포드가 압도적이고 시보레, 뷰익이 뒤를 잇는다. 백화점과 자동차는 이 두 가지는 민중에겐 선망이자 귀헌 귀경거리다.
2011년 전북에선 LH본사를 진주로 강탈당했다며 대규모 관제 플래카드가 분기탱천헌다. 80년 전인 1931년엔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가자 횃불시위, 투석전 등 강경대응이 괴잉장한다.
일본의 위생파시즘은 여전히 극성이다. 변소의 위치를 집 뒤로 할 것, 요강을 버릴 것 등을 강조헌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거주하던 적산가옥의 변소가 집 뒤안에 있었다.
‘현대 여성은 반드시 아지노모노를 써서 가정의 식사를 유쾌허게 한다’란 광고문구는 ‘푸르지에 살면 김태희된다’는 광고카피와 유사하다.
부어라 마셔라 흥청망청대는 토산(土産) 트리스마스의 추억도 그즈음 발호헌다.
내가 쓰는 우리말을 매급시 사투리로 규정헌 건 당시 일제에서 비롯하였고, 무속을 미신으로 나아가 세시풍속까정 미신으로 규정헌 것도 일제인데 이는 노태우 정권의 ‘민속의 날’까정 이어진다. 물론 인육영악설이나 담취만습(膽取蠻習)등은 중대 범죄니만큼 논외로 한다.
벤또 하나면 차면 공순이, 버스걸로 보일 수 있으니 책보에 그 무거운 잡지책을 가득 담아 집을 나선다. 여대생이 대접받던 80년대까정도 가슴엔 큼지막한 전공서적을 안고 댕기는데 일부는 큰 가슴을 전공서적으로 캄푸락치헌다.
끝으로 당시에도 일본 유학생의 취업난은 여전하고 극히 일부만 고등문관, 행정관료의 길, 금융조합등에 들어간다. 이런 암울헌 사회상으로 많은 지식인 계급이 사회주의로 흐르게 되어 수많은 막스보이와 엥겔스걸을 맹글어낸다. 1937년 중학교 지원자 2.8만 명 중 겨우 0.4만 명만이 합격한다 (6:1) 전과, 보통문과 수험서적, 순사시험 서적서는 오늘날까정 스테디셀러다. 단, 일본어가 한국어로 바뀌었을 뿐.
총독부 고등관은 ‘관계의 꽃’이다. 1938년 230명의 총독부 고등관 중 조선인은 12명에 불과하다. 오늘날엔 재경부 엘리트들이 최고라 불리우나 내가 보기엔 순수혈통을 자랑허는 외통부 ‘외교관’은 가히 유아독존적 존재다.
<1920년대 군산 메이지정 일대>
미나카이백화점 군산점이 이곳 어디쯤에 있었을 것이다.
<현재의 군산시 중앙로 1번지 일대>
유아기적 군산의 추억을 간직허고 있는 당시의 일인 거주자들이 간혹 찾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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