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은 다음날(book)

봉순이 언니, 1998, 공지영

큼지막한 글씨에 넉넉한 줄간격, 20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 게다가 술술 소화되는 문맥까지... 흡사 국민학생 때 동네 가정집에서 겨울에만 반짝 하던 만화방 아랫묵에서 배 깔고 누워 읽던 만화같은 감흥이랄까? 대개 만화의 내용은 기억나진 않으나 몰입 당시의 잔잔한 흥분이 있었고, (그땐 왜 그렇게 잔잔한 내용의 만화들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만화방 연탄 아궁이가 맹글어주는 특유의 훈김은 매 페이지마다의 시커먼 잉크내음에 녹아 들어갔으며, 외부를 비닐로 꽁꽁 동여맨 창을 통해 어스름허게 비치던 고드름이 투둑 땅에 떨어질 때마다 한장한장  페이지를 넘기곤 했다. 만화방엔 계피가루 점점이 뿌린 뜨거운 호떡이 있었다면 지금 봉순이언니를 읽고 있는 전주대 도서관 열람석 책상위엔 600원짜리 계피향 뜨거운 카푸치노 커피가 놓여 있다. 첫페이지부터 마지막장까지 일체의 미동없이 읽을 수도 있으나 시큰해지는 허리를 달래기 위해 잠시 도서관 남측에 있는 화장실에 간다. 마침 언론에서는 100년만의 혹한이다고 호들갑이다. 하루 종일 -10 ~ -5도의 찬기운이 화장실 환풍구를 무겁게 압박하고 있어 담뱃내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화장실 특유의 암모니아향과 함께 브라운동중이다. 한겨울 만화방의 재래식 변소 한쪽엔 차가운 냉기로 온종일 빠져나가지 못한 습기에 눅눅해진, 똥내와 담뱃내를 가득 품고 있는 시커먼 거름용 재가 쟁여져 있었는데 그 냄새와 똑같다. (입으론 흙에 사니, 고향이니, 웰빙이니 하지만 이 혹한에 바람 숭숭 들어오는, 어렸을 적 재래식 화장실에서 일 보라고 한다면 단연코 거절하겠다)


그들만의 이야기, 억지 이야기가 아닌, 부모님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를 읽을 땐 울림의 높낮이는 한결 깊고 높다. 어렸을 적 어디에서든 볼 수 있었던 평범하기만 한 봉순이 언니는 짱아의 놀라운 기억력과 상상력에 의해 구체적이고 세밀한, 그러나 남다른 것 없는, 의미를 부여받는다. 봉순이 언니는 세탁소 건달총각과의 예정된, 첫사랑의 실패 후에도 끊임없이 남자들을 만나고, 도망치고, 매번 혼자가 되어 돌아왔고, 그 때마다 아이를 하나씩 더 달고 왔을 뿐... 점점 더 가난뱅이가 되어간다. 공지영은 이런 봉순이 언니를 통해 삶의 방향을 결정허는 건 바로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총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그 순간의 그일 자체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봉순이 언니뿐이 아니라 사람은 태어나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삶의 총궤적이라는 곡선 혹은 곡면만을 관찰해 본다면, 별다른 특이점 없는, 저마다의 운명에 의해 부유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고 볼 수 있다. 매순간 순간의 선택이 쉬워 보이고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인생이라는 전 과정에서 본다면 얼마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과정이던가? 이런 공지영의 글이기에 짱아네 집 마당의 맨드라미, 엄마가 입던 모슬린 원피스, 짱아가 팀닉하던 만화책, 덮고 자던 자주색 공단 이불은 금세 나의 것이 되고, 어린 나는 이내 짱아가 되며, 나의 누나는 봉순이가 되는 것이다. 비록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도서관을 나오며>

저녁 7시반 도서관을 나올 때 전신에 끼쳐오는 찬바람은 지금 이시각 어디에선가 부유허고 있을 봉순이 언니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관성으로 백마상 정문까지 미끄러져 내려오고 탄력이 죽을때쯤 3단에 기어를 넣으려니 한번에 들어가지 않는다. (한겨울 추위에선 3단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매급시 4단에 후까시를 넣은 후 다시 집어넣자 한번에 쑤욱 들어간다. 정지상태에서 후진넣을 땐 먼저 1단으로 후까시를 주나, 주행 중 후까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봉순이 언니는 첫선 보러 갈 때야 비로소 머리에 후까시 넣었으나 내 차는 이래저래 후까시가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