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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은 다음날(book)

한국 근대사산책 제 7권 강준만

 

관동대지진 당시 동경의 3만 조선인 중 6천명이 학살당한다. 일본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유언비어로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걸로 2003년 드러난다. 물론 당시 유언비어 취체령은 있으나마나다.


1923년 1월 신채호가 기초한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은 독립군 10만명보다 1인의 폭파를 중시하는 폭력민중혁명을 지지한다.  (Anacho syndicalism)  당시 무정부주의 사상가로는 Mikhail bakunin과 Kropotkin이 있으며 신채호야말로 진정한 자유주의자, 공동체주의자이다. 의열단원은 수영, 테니스, 그 밖의 운동 등으로 항상 최상의 심신을 유지하고, 말끔한 양복, 2:8의 정갈한 머리손질을 한다. 늘 죽음이 눈앞에 있어 생명이 지속되는 한 멋지게 살고자 한다.


3.1운동 직후 3면1교주의의 보통학교의 수가 서당을 압도허기 시작한다. 이때 ‘공부허지 못 허면 땅이나 파 먹고 산다’는 속설이 진리로 굳어진다.  당시엔 보통학교도 구술시험을 거치는데 유전입학 무전낙제가 회자된다.  수업료 체납시 세무당국은 가정까지 찾아가 이자를 더해 가재도구 차압까지 한다. 29년 당시 취학률은 18.4%이며 그나마 중퇴율이 32~60%에 달한다. 중등경쟁률은 10:1로 전쟁터다. 22년 경성, 29년 대구, 평양에 각각 사범학교가 개교허는데 학비가 전액 무료일 뿐만 아니라 상위 40%는 생활비까지 지원한다.  또한 22년에 보성, 연희, 이화여전을 민립대학으로 승격시키려 했지만 대중교육이 시급하다는 사회주의자의 반대로 실패한다. 1924년 예과, 법문학부, 의학부로 개교한 경성제대는 일제가 내지학생들에게 ‘프론티어정신’을 강조하며 많은 일인학생을 입학시킨다. 이공학부는 41년에야 개설된다. 조선인의 세금으로 지어진 경성제대이지만  첫해 168명의 입학생 중 조선인 학생은 44명 뿐이고 35년간 810명에 불과하다. 물론 입학식은 칙어봉독, 군대합창순으로 진행된다. 조선인 학생은 사회적으로 ‘요보’를 뛰어넘을 수 없다.

*요보 : 일본인을 ‘게다’로 업수이 여기듯 일본인은 조선인을 ‘조센진’혹은‘요보(여보세요)’로 업수이 여김

서울대는 공식적으로 1946년 개교하나 의과대학사, 법과 백년사 등을 보면 제국대학 시절까지 자랑스럽게 뻗쳐 나간다.  일찍이 윤치호는 사환심(仕宦心)을 버려라 주문하며 집안이 망하거나 사회가 퇴폐하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글 읽어 과거합격하자는 세태를 비난한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환심을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최고학벌이 필요하다. 고시열풍은 당시에도 창궐한 사무라이적 엘리트의식의 다름 아니다. 은행원은 사상보다는 직업에, 민족보다는 월급에 천착한다. 


1923년 암태도 소작쟁의로 7~8할에 달하던 소작료가 4할로 떨어지기도 하지만 조선농민의 반수 이상인 소작농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조선노농총연맹은 ‘노농계급의 해방과 신사회건설’‘소작료는 3할 이내로 할 것’등을 내세웠으며 개벽, 개조, 청년이라는 말들이 유행한다. 20년대의 조선일보는 마치 공산주의 이념의 교과서와 같다.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사회혁명을 논하지 않으면 사람축에도 들지 못 할 지경으로 이미 청년들 사이에선 ‘처세의 상식’이다. 누가 그랬던가?‘억지로라도 맑스 도금술과 엥겔스 염색술을 발명하여 사상적 낙오자됨을 면하기에 노력한다’고. 한편 기독교는 변함없이 인종과 순종의 도덕을 강조하여 민중의 아편, 고등무당이라 비판받는다.



요즘 고소득 전문직종의 대명사라면 변호사가 떠 오르지만 1920년대는 변사였다. 당시 고급관리의 월급이 30~40원이지만 변사들은 70~80원이고 지방에서 출연제의가 쇄도하며 일류기생첩을 거느리기도 한다. 무성영화에서 변사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1926년작‘아리랑’의  필름은 하나지만 영화 아리랑은 다양했다. 성에 눈 뜬 처녀들이 사랑의 모든 수단과 양식을 단성사, 조선극장의 스크린에서 취한다. 그러나 요즘 아리랑의 필름은 물론 1960년대의 필름조차도 찾기 힘들다. 우리의 필름관리는 대단히 허술하다. 한동안 영화필름에서 은을 추출하고 밀짚모자의 테두리에는 영화필름을 장식으로 두르기도 한다.


동척의 조선지사 산하 모두 9개의 지점 중 김제지점도 있었는데 위치는 구동진농조 현김제지역자활센터로 추측한다. 동척이 토지조사 후 20년대말까지 취득한 토지는 모두 9만 정보로 이는 2~3개 군의 면적에 해당한다. 당시에도 실업문제는 여전하다. 일본인은 조선으로 쌀밥을 먹기 위해 이전하고 조선인은 만주로 조밥이라도 먹기 위해 이주한다. 일인 이주민은 1942년 기준 75만명에 달하고 밀항 브로커까지 활개친다. 


1926년 경성라디오국 개국은 조선은 미, 영, 불, 독, 일에 이어 세계 여섯 번째다. 진공관 라디오는 40~100원에 월 청취료는 2원이다. 당시 영화관 입장료가 30전이니 적지 않은 금액이다. 라디오 수신기는 필히 등록 후 대문밖엔 ‘청취허가증’을 부착한다. 이는 부의 상징이다. 개국당시 1440대(일인 1165대)가 등록하고 미등록, 도청까지 포함 6000~7000명은 수신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예능프로의 기생들은 일본기생 출연료의 절반에 불과한 수입으로 출연을 거부한다.


어느 한해 그러지 않은 때가 있으랴마는 1920년대야말로, 적어도 담론상으로나마, 청년, 청춘의 전성시대였다. “청년, 청춘, 소년 등은 부모의 세대를 완고한 전근대로 돌려 버리며 근대를 선도했던 주체의 형식”이다. 타翁(타고르)은 당시 ‘빗나는 동아세아 등촉 켜지는 날엔 동방의 빗’이라 한다. 이미 기성세대는 나라를 빼앗긴 죄인이기에 이제 희망은 어린이와 청춘에게 걸 수밖에...


1930년대 고무신 광고는 매우 치열하다. 만월표, 별표, 거북선표(미끄럼 방지에 특화)등 등... 거북선표의 광고문구가 재밌다. ‘가짜 거북선표가 많사오니 물결바닥을 사십시오’

1921년 2개의 고무신 공장이 33년 72개로 급증하고 37년엔 도시민, 학생은 다 고무신을 신는다. 고무신 공장의 여공은 무지 힘들었지만 당시 25명 모집에 800명의 헐벗은 처녀들이 공장 앞에 운집한다. 그나마 태평양전쟁 발발 후 고무징발령으로 고무신은 매우 귀해져 다시 짚세기, 혹은 맨발이 거리에 활보하기 시작한다.


뱃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현진건의 고향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