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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Motorbike(체게바라처럼)

다운타운으로 3일만에 또 찾은 내변산, 계화도

 

다운타운으로 3일만에 또 찾은 내변산, 계화도


안녕하세요?


 저번 화욜 뉴스를 보니 모레(목욜)부터 본격적인 추위가 온다니 금번 시즌 마지막이라 생각허고 그저께(목욜) 다시 한번 내변산에 댕겨 왔습니다. 불과 3일전 댕겨 온 데를 코스만 조금 달리 하여 또 댕겨 옵니다.

한갓진 데는 살짝 신호패스해 주며 신호 대기시에는 맨앞에 스면서 시속 80~100k 정도로 내내 탄력주행을 허니 전주에서 내변산 정상 무렵까지는 40~50여분이면 갈 듯 헙니다. (차로는 아무리 빨리 간다 해도 70~80분이 걸리지 않을까...) 같은 거리가 이렇게 짧아지니 전라북도가 손바닥 안에 있는 듯 아찔해 집니다. 월명암 등산로 입구부터 부안댐으로 이어지는 완만하고 긴 내리막에서는 구름우그인 듯 머리카락 끝이서 불꽃이 입니다. 


  125cc지만 기본기가 탄탄헌 몸체와 광폭 타이어는 고속에서 안정적으로 주행하게 해 주며, 패드 뽀송뽀송헌 디스크브레이크의 ‘슈슉’허는 질감도 쓰로틀 못 지 않은 쾌감이 있습니다. 특히  ‘투둑’하며 과속방지턱을  통과헐 때 쇼바반응도 아조 깔끔헙니다. 그 어떤 4바퀴 차에서도 경험허지 못 했던 깔끔함이 엉덩이를 실룩거리게 합니다.


3주전 처음 ‘다타’를 탈 땐  바짝 긴장헌 탓인지 다소 버거웠고 내가 이걸 제대로 콘트롤헐 수 있을까 걱정도 됐지만 그새 많이 익숙해 졌습니다.

 

 길이 끊겨져 처음 멈춘 곳, 계화면 문포항 수산물 공판장.

 


 

 

 

 사진상으론 짤렸지만 공판장지붕의 소나무 골격을 보니 보존가치가 있는 ‘근대유적’급으로 느껴진다.

물론 문포항 앞바다는 이미 바다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황무지’다.

 

 

 

 계화면 창북리 길가시 풍경.

창북리는 돈지와 계화리와 함께 1978~1979년 섬진강댐 이주민들의 집단 이주책으로 맹글어진 '신도시급' 농촌거점 마을이다.

 

 

 

계화리와 돈지를 잇는 계화방조제 길 .

70년대 말 국민핵교에 입학하고 첫 소풍코스로 당시엔 염생식물이 듬성듬성허고 먼지 날리는 시골길이었는데 무지 멀었고 다리도 상당히 보깼던 것 같다. 내비게이션으로 확인 히 보니 왕복 15km정도다. 초등핵교 1학년 애기가 왕복 15km를 구보허다니 지금으로선 상상헐 수 없는 아동학대에 다름 아니다.

 

 

 

계화방조제 우그서 봄.

목하 해체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계화방조제서 본 돈지

새만금 방조제 어딘가를 때리 막기 위해 저멀리 야산 하나가 하얀 돌가루를 물며 잠식되고 있는 중이다.

 

 


계화방조제서 본 외해

말 그대로 황무지다. 도대체 왜...

 

 

 

 돈지 협동상회 앞.

저곳은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계화평야에서 논일 허고 자징거나 오토바이에 삽을 끼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네 아저씨들이 들러 막걸리 한잔을 축이던 동네 점빵이다. 겨울에는 육빽이나 민화투로 소일허던 동네 사랑방이었다.

 


협동상회 뒤편 신돈지3단지 전경.

양철로 지어진 섬진강댐 이주대책용 양철주택으로 파란색과 붉은색의 지붕색 옵션이 있었는디 이젠 죄다 허물어지거나 그나마 남은 곳도 거무스레헌 녹빛 투성이다. 외벽과 지붕의 뺑끼 냄새와 가설극장서 뿌려대던 선정적인 영화 찌라시의 독헌 잉크향은 78년 어느 날의 코끝 매운 추억이다.  

 

 


협동상회 앞이서 바라 본 돈지 진입로

실제 보니 왼쪽의 나무는 이제 제법 고목티가 난다.

 

 

 

98년가 99년인가에 폐교된 의 복 초

학교 입구의 사자상, 정원의 각종 동물상이나 장군상, 누나상은 지역 유지나 유력 동문의 찬조로 세워지는데 80년대 초반 전국 국민핵교의 유행이었다.

 


쑥대밭

한동안은 무슨 생태학교로 혹은 무슨 영농법인 사무실로 쓰였으나 역시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은 이내 쑥대가 점령허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내변산 청림리 3거리

91년쯤 포장된 곳이다. 그전엔 오토바이나 버스로만 올 수 있는 곳으로 새초롬헌 자가용으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오지였다. 이곳은 77년 한겨울 어느날 집안 시앙 모시러 온 게 첫 기억이다. 버스 뒷좌석이 앉았는디 버스가 요동칠 때마다 꼬마의 머리는 천장에 디딜방아를 찔 정도였다. 물론 버스에서 내린 후 기본 5키로로 정도는 걸었다. 손꼬락이 갈라지는 듯한 칼바람 또한 잊혀지질 않는다. 앞으로도 당시 추위를 능가허는 경험은, 설령 그곳이 남극이라도, 없을 것이다.

 

 


내변산을 뒤로 하고 하서면 길가시서

이 도로는 일제가 자국민 여름휴가 용도로 30년대에 뚫어놓은 도로로, 73년에 포장된, 국가 중점 도로이다.

 

 


부량교 

부안과 전주를 잇는 최초의 다리로 단기 4292년(1958년) 세워졌다.  인공 시기 교각에서 작은 할아버지를 비롯한 수 많은 양민이 학살된 곳이다.

 


신태인읍

곳곳이 신축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1990년 이후 하강 기운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는 느낌이다.  

 

 

 

원평 길가시서

대로에 ooo씨 자 ooo군 행정고시 합격 플래카드가 석점이나 펄럭이고 있다.

 

 

 

 

 

금구에서 이서를 잇는 도로에서 후열 중

 

 

 

대충 오늘 오후 내변산만 댕겨오는디 250k는 뛴 거 같다. 전주서 서울까지 갈 수 있는 거리로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