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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한옥

 

한적헌 길을 가다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폐가들!

특히 전통가옥 모습 그대로 스러져 가고 있는 집들을 보면 더욱 눈길을 끈다.

자식들은 타지로 떠나고 노부부만 웅숭거리며 살고 있는 농가들이 개개 농촌마을의 7할, 8할은 될 것이다.

입식으로 개조헌 대청마루(거실) 한쪽 벽에는 자식들 결혼사진, ‘학사모 쓴 졸업사진’이 걸려있고,

안방 옆 작은 방에는 어김없이 오래된 책상이  놓여있고, 책상위 벽에는 각종 ‘상장’들이,

책꽂이에는 누렇게 뜬 ‘수학의 정석’ ‘성문영어’ ‘졸업앨범’ ‘일기장’ 등이,

한쪽 구석에는 ‘고추’ ‘깨’ ‘대추’ 등이 조용히 세월에 발효되고 있을 것이다.

이마저도 10~20년 후에 한분이 먼저 가시면 남은 분은 집에서, 혹은 인근 요양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허실 것이다.

급속허게 붕괴되고 있다고 헐까?

반감기는 방사성물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농촌마을에도 관통허고 있는 것이다.


96, 97년에 고가가 있는 이길로 1년여 출퇴근했었다.

당시에는 길이 마실길 비스무리허게 꼬불꼬불허고 좁아서 드러나지 않았는데, 삼사년전 2차선으로 확장되면서 비로소 눈에 들어온 것이다.

왕궁처럼 두텁게 쌓아올린 붉은 벽돌의 담은 중국식 조적을,

 오밀조밀허게 배치헌 다락, 벽장, 작은방들은 일식 배치를,

기둥, 천장, 기와, 벽, 등 전체적인 체계는 한식을 적용하였다.

이렇게 사람이 떠난 후 흙으로 화허고 있는 것은 20년 전부터 라고 헌다.

 

<대문을 들어서며 본 모습>

붉은 녹이 제멋대로 증식허고 있는 철문을 들어서자 잡초들이 온 마당을 뒤덮고 있다.

잡초도 급이 있는가 보다. 쑥대밭처럼 억센 잡초가 아닌 보드라운 잡초다.

과거에는 이 풀 대신 지름진 잔디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발에 밟히는 느낌 또한 예사 마당이 아니다.

온몸으로는 딴딴헌 느낌이면서도 발바닥에는 잔잔헌 부드러움이 남는다.

천년사찰 앞마당의 땅고름이다.

 

 

<동쪽으로 본 앞마루>

 

<서쪽으로 본 앞마루>

전체적으로 좌우로 안정적으로 보이며 마루에 올라서서 한쪽 끝에서 한쪽 끝을 바라보는 느낌은

밖에서 보는 것 이상으로 아찔허게 광활헌 느낌이다. 해인사 장경판전에서의 ‘아찔함’이다.

마루를 따라 늘어선 기둥 하나하나는 수백년 된 판옥선 용골 못지 않게 우직헌 ‘굉’이 박혀 있었으며

결 또한 미세한 곡선이 흐르고 있어 목수가 하나하나 다듬었음을 짐작케 헌다.

 

 

< 천장>

천장을 지탱허고 있는 크고 작은 보들은 아예 일체의 가공을 배제허고 삼긴대로 활용하였다.

 

 


<뒷마루>

뒷마루는 일단 천장이 낮으며, 마루는 길지 않은 대신 장방향으로 넓고 부엌으로도 연결되어 있어

둘러앉아 잔치음식을 장만허는 등 아녀자들이 도모허기에 적합헌 공간으로 보였다.

앞마루가 ‘남성’의 것이었다면 뒷마루는 ‘아녀자’의 것이었다.

 

 


< 행가? >

무얼 걸어두기 위함일텐데...

 

 


<벽장문에 붙여진 그림>

‘춘복이’처럼 까막눈이라 통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예사작품은 아닌 듯 보인다.

 

 


<작은방에 쟁여진 가구들>

원목을 아끼지 않고 맹글어서 먼지만 훌훌 털어내면 아직도 쓸 만허게 보였다.

놋쇠 손잡이 등은 녹 대신 검고 푸른 이끼가 있어 예스럽다.

 

 


<장식장 유리문>

HAITAI AL CANDY!



다락방에는 각종 물건들이 흩어져 있다.

일정 때 큰 관급공사를 관리한 듯한 서류뭉치,

역시 일정 때 맹글어졌을 우윳빛보다 더 지름져 보이는 찻잔세트, 표주박, 70년대 발행헌 ‘신동아’등등.

덕분에 몇점은 가져와서 요긴허게 쓰고 있다.

 장독대에는 콩쥐가 평생 물을 들이부어도 다 차지 않을 엄청난 크기의 항아리가 놓여 있다.

항아리의 검붉은 ‘윤기’는 갈수록 빛을 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