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리 가게
외삼촌이 나 자전거 태워 십리길 갈 때
나운리 가게 앞에서 외삼촌은 물 얻어먹고
나는 눈깔사탕 사 줘서 입에 넣었다
먼지 쓴 유리상자에 눈깔사탕 여남은 개 있었다
명태 한 죽도 시렁에 얹혀 있었다
가게방 미닫이문 창호지에 유리가 박혀
방안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외삼촌의 돈 거슬러주려고 가게주인 미닫이 확 열었을 때
단발머리가 앉아 있었다
서본 적 없는 앉은뱅이 앉아 있었다
별 못 보아 초저녁 달같이 하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나는 다시 자전거 뒤에 타고 가는데
그 얼굴이 끝까지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 보며 앉아서 큰아기되어
세상을 깊이 서러워할 것도 없이 지나가는 사람 보며 앉아 있었다
옥정골 미친년
옥정골 아랫마을 고행렬이 딸
나이 차 시집가기 좋게 살 올랐는데
작년부터 슬쩍슬쩍 딴짓 보이더니 이제 영 글러버렸다
아주 미쳐 뒤란 장독대에 가 뚜껑이란 뚜껑 다 열어놓고
소나기 지나가 장 비 맞아 못쓰게 만들어 놓고
어머니 농짝 다 열어 옷이란 옷 다 내다 마당에 널어놓았다
제 아버지 고행렬이 술 먹고 와 미친 딸 마구 패어대니
제 어머니 울며불며 매 막아 맞으며 울며불며
아이고 내가 무슨 죄 지어서 전생에 무슨 죄 지어서
딸이 아니라 원수 애미가 아니라 원수 되어
차라리 죄로 가면 개 되든지 돼지가 되든지 하지
하필 주정뱅이 서방에다가 미친년 딸년에다가 친정아버지 소경에다가
무슨 심청이라고 아이고 아이고
막내딸
흰 산싸리꽃 그 꽃 꺾어들고 혼자 산길 내려오는 배서방 막내딸
굶으면 밤에 귀신 나와도 무섭지 않다 하나도 무섭지 않다
오늘도 아침 그냥 넘겼다
산에 와 어린 손으로 송기 벗겨 먹고 싸리꽃 꺾어 들고 내려온다
암 그래야지
누렇게 뜬 얼굴 그 얼굴
싸리꽃이라도 진달래꽃 대신 따 먹으라고 어린동생 주려고 후딱 내려온다
내려오다가 헛디디어 굴러버린다
울지 않는다
울다니 이 싸가지 없는 세상 울다니
턱점백이
앗 뜨거워라
아직 비지탕도 되기 전인데 좀 뜨거워지려 하는데
시금치 넣으려다 깨방정 떨며 질겁하니
이제 열일곱 시악씨 때깔이어요
하지만 그런 딸 보고 걱정까지는 안 하거니와
반걱정으로 뜨거운 것 못 만지면 사림이 안 고인다
하기사 계집에게 사람 끓어 좋을 것 없지만
그래도 그렇지 시집가서 시집식구 인심 못 얻으면 동네 인심 못 얻으면
시집살이 안팎으로 고달플밖에
괜찮아요 머
나 어머니하고 살다 죽을래 시집 안 갈래
그러던 옆집 턱점백이 그 말이 씨가 되어
다음해 맞배 병아리 깐 뒤 중신에미 문턱 낮춰 드나들더라
그렇게 되자 턱점백이 어머니가
시집갈 딸 턱점백이에게 이것저것 알려주고 야단이더라
시집가서 첫째 요강에 오줌 쌀 때 리 죽여야 혀
부엌 살강밑에서 아무도 없다고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말어 살강밑에 살강영감 계시니
애기 둘 낳기 전까지는 서방님 말에 말대꾸하지 말어
아무리 원통한 일 생겨도 친정 생각 하지 말어
친정부모는 저승부모여 저승부모
갈퀴손
그야말로 갈퀴 없으면 손으로 긁어 나무 한 짐 해 오는 기달이네 할머니
누가 뭐라고 해도 산주인이 뭐라고 해도 눈 딱 감고 나무 한 짐 해 오는 기달이네 할머니
아니 저 늙은이가 귓구녁 막혔나 실성했나 하고 젊은 산주인 욕 퍼부어도
어디 내 구럭 빼앗아봐라 하고 끄덕도 안 허고 나무 한 짐 해 오는 기달이네 할머니
웬만한 갈퀴보다 그 갈퀴손 갈퀴 열 몫 단단히 하고
비 오는 날 잠자는 동안 그 갈퀴손도 잠자는구나
비 그치자 산들바람 한 자락
턱점백이 신랑
허 그녀석 인물 한번 훤허네
턱점백이 아까운데 아깝지 않네 이 한 쌍 좀 좋은가
사모관대하고 원삼 족두리면 다 좋기는 좋으나
턱점백이 데려가는 신랑 그녀석 의젓하네
어디 보자 동상례 때 너 이놈 두고 보자
이렇게 벼르던 동네 총각들
정작 그날 신랑 다루다 신랑 다리 보고 질겁했네
그 다리 하나가 제 다리 아니었네 의족이었네
에잇 못 볼 것 보았네
신부 턱점백이 울고 턱점백이 어머니 울고 턱점백이 사촌언니 울고불고
그러나 시집으로 돌아가 아들 삼형제 딸 형제 낳고 잘 먹고 잘 살았다네
2학년 담임선생
가네무라 선생
전주사범학교 나와 우리학교에 부임한 가네무라 선생
국민복 입으면 몸이 옷 밖으로 뛰어나올 듯한 가네무라 선생
아이들이 음악시간 풍금 들고 오면
그 풍금 치며 노래할 때는 목울대 유난히 떨려
도둑질하고 무서워 떤다고 여기게 했던 가네무라 선생
조선사람인데 조선말 한마디 쓰지 않고 빠가야로 빠가야로
하루도 빼놓지 않는 빠가야로
아이들한테 손찌검은 없어도
걸핏하면 벌주어 2학년 교실 복도에는 두 손 들고 서 있는 아이들 수두룩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알려주었다
가네무라 선생의 조선이름은 김지웅이다!
그때 우리는 하늘같이 무서웠던 가네무라 선생이 우리하고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조선사람임을 알았다
신촌 도요하라 시게오란 놈이 비 오는 날 실내 조회 첫머리에 일어서서
선생님 진짜 이름은 김지웅이지요? 하고 물었다
그는 새빨간 얼굴로 아이들 80명 다 소바닥 펴게 하여 회초리로 세 대씩 때렸다
빠가야로 빠가야로
문옥자
개사리 문옥자
이질 걸려 죽었다던 문옥자
한 달 뒤 살아서 학교 나왔다
야 너 설사 백번이나 했다지 하고 한 아이가 묻자
그냥 엉엉 울음 터뜨렸다
그 문옥자가 이번에는 제 어머니 약에 쓰려고
우리 동네 연밥 구하려 왔을 때
문옥자 아버지하고 문옥자 왔을 때
나는 할미산 꼭대기로 도망갔다
문옥자도 가난뱅이 우리집도 가난뱅이
똑같은 가난이 서로 부끄러웠다
언젠가 내가 개사리 갔을 때 문옥자가 숨어버렸다
학교에서는 다마꼬쨩이지만 히라오까 다마꼬지만 집에서는 문옥자였다
어머니 죽은 뒤 밥 해먹으며 학교 다니는 문옥자였다
묵은 장
새 장터보다 묵은 장에 더 먹을 것 푸짐하다
그러나 빈털터리 아버지 따라간 상진이
그 많은 먹을 것 그냥 지나간다
침도 못 삼키고 눈만 켜고
이 세상은 절대로 먹고 싶은 것 공짜로 먹을 수 없다
돈 없이 먹을 수 없다
어린 상진이 열두 살에 진리 깨쳤다
배고팠다
굶는 집
다섯식구 옥순이 아버지 옥순이 어머니 옥순이 옥순이 동생 옥순이 둘째동생
더 낳을 힘이 없어 둘째가 막내인지
배고파서 하루 이틀 꼬박 굶고 물배만 채워
다섯 식구 서로 얼굴 보고 앉았다
옥순이 둘째동생 그 어닌 것이 한 마리 소가 되어 짚도 풀도 먹고
고구마넝클도 먹을 수 있으면
차천자
난세에는 천자가 많이 내려오시는구나
천자가 많아 더욱 난세로다
흠치교 강일순도 난세의 천자렷다
그 천자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았으나
흠치교 증산교 작파해 버리고 정읍 차경석이 흠치교에서 익힌 솜씨로다가
한술 더 떠 선도교 열어 어디 봐라 동방천자가 되었구나
선도교를 보화교로 또 그것을 보천교로 이름 바꿔
조선총독부의 민간신앙정책 타고 앉아 혹세무민의 교세를 떨쳤도다
한말 동학이래 김제 모악산 기슭
아니면 계룡산 신도안
정읍 내장산 기슭에는
어찌 그리도 천자가 많이 내려오셨는가
지금의 서울 조계사 대웅전이 바로 차천자 본궁 옮겨다 세운 것이렷다
난세를 더 어지렵히는 자 이른바 후천개벽의 천자이니라
이 천자로 하여 일제의 조선 민중 깨칠 줄 모르고
그저 천지공사나 빌고 썩어갔도다
오호라
이 천자들 징치함이 옳겠구나 옳겠구나
나까무라 요네 선생
미룡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
학교 기숙사 방 두칸짜리
한 방은 늙은 부모 한 방은 외동딸이 사는데
그 분냄새 나는 외동딸 담임선생
글씨 잘 쓰는 선생
아름다운 선생
내가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조선어시간 없어지고 국어시간뿐이었는데
그 아이우에오 가기구게고 국어 가르친 처녀선생
흰 살결 흰 손가락으로 풍금 잘 쳤다
가슴에 꽃 하나 꽂고
나더러 너는 왜 할아버지처럼 늙었느냐고 했다
못 먹어서 쭈글쭈글한 나더러
내가 배운 건 부끄러움이 먼저였다
그 다음이 천황폐하였다
은석이 누나
은석이 누나 봉순이는 열여섯 살
봉순이는 3년째 병들어 누워 있다가
가을걷이 바쁜 날 어느날 양잿물 퍼 먹고 죽어버렸다
바빠도 그년 송장은 묻어야지
은석이 어머니 말 한마디 잘 죽었다
죽어 자식들 제사상 받으면 뭘 하느냐
살아서 약 한 첩 없이 병아리죽 없이 병 앓던 년 네년
귀신
나는 열 살까지 영 죽을똥말똥 했다
나는 열 살 안에 늙어버렸다
한밤중 자다가 귀신이 보였다
소리 질러 식은 땀으로 멱 감고 있으면
아버지가 벌거숭이로 자다가 낫 찾아 새벽 벽에 걸어두었다
이놈의 귀신 또 오기만 와봐라
쳐죽이겠다 쳐죽이겠다
나는 열 살 넘어서까지 귀신에 시달렸다
귀신 나온 밤은 길고 길었다
다음날 대낮도 대낮의 나무와 풀과 먼 산도
내 무서움을 다 덜어주지 못했다
그 귀신이 싹 없어진 건 내가 밥을 굶지 않을 때부터였다
하루 세 끄니 먹을 때였다
뱃속의 회 동하여 횟배 앓을 때부터였다
귀신이란 뭐냐 나는 안다
그건 굶주림이다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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