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내 각종 관련 사건사고가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해 살아남은 자의 입맛에 맞게 어떻게 은폐 조작되는지 예리하게 통찰한 윤흥길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을 읽던 중 천안함이 좌초하더니, 1950년 7~9월까지 3개월의 서울시내 인공치하에서 하루하루의 공습상황, 비참했던 이웃의 생활상을 일기로 남긴 김성칠의 ‘역사앞에서’를 읽던 중 연평도 사태가 터졌다. 거대한 상징만 왕성하게 전진허는 듯 보이지만, 역시 세상은 돌고 도는가 보다.
사마천의 사기가 그러하듯 역사는 교과서에 등장하는 위인이, 연표에 등장하는 그럴듯한 상징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런 위인전을 통해서는 내세울 수 있는 객관식 시험에는 유리할지언정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역사 앞에서’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내가 60년 전 인공치하 서울 한복판의 어느 다락방에서 마음 졸이고 두눈 꿈뻑이며 써나간, 나의 글이듯 하여 더욱 공감이 간다. 이렇게 일기 ‘역사 앞에서’는 보통사람들이 역사를 추진하는 원동력임을 뚜렷하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역사서는 그들만의 책이지만 일기는 나의 책이며, 나의 역사서인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 민중은 날카롭기만 한 양극단은 지향하지 않은 채 희뿌연한 연무색 구도를 지향할 수 밖에 없다. 민초는 살기 위하여 자양분이 풍부한 습한 안개 속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본문 中>
우리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고 거듭 외치었다. 그러나 자꾸만 가까워지는 총포성은 무엇을 의미함일까?
어제 본 국군과 이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그들이 상냥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적개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저녁 무렵엔 이미 붉은 완장을 차고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어제까지 대한청년단의 감찰부 완장을 차고 자전거를 달리던 청년도 섞여 있었다.
나도 오늘은 짤막한 노타이에 쓰봉만 걸치고 거리에 나가서 이백원짜리 보릿짚 모자를 한개 사 썼다.
나도 붉은 잉크와 푸른 잉크를 내어놓고 공화국기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대개는 같은 문구를 이 단체 저 단체에서 경쟁적으로 써 붙인 것 같다.
다른 목적으로 모였던 회합이 곧잘 궐기대회로 변하여 그 자리에서 의용군을 뽑아 보내게 되므로 백성들은 이제 다 눈치를 알아채고 무슨 모임이든지 집회에는 노인이 아니면 여자로 판을 친다.
그보다도 이른바 해방촌이 맹폭을 입었고, 이로 인하여 무려 수천 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났다.
여기서 본 인민군들도 모두 행동거지가 단아하고 정중하여, 이즈음 늘 갖는 느낌이지만 인민군은 질이 좋고 훈련이 잘 되어 있다.
반동이라는 레테르 하나 때문에 적어도 남의 앞에선 ‘리승만’이라 하여야겠고 그게 싫으면 어두에 ‘ㄹ’음이 붙는 말은 안 쓰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정치는 언제나 진선진미하게 잘 되어나가고 신문은 이에 대한 최대한의 찬사와 송사를 되풀이할 뿐,
18세기 불란서 혁명 당시의 세상이 어쩌면 그리도 오늘날 이 땅의 현실과 부합되는 것인지,
총을 쏘라우, 이대로 창사가 곯아 비틀어져 죽는 괴로움보다는 차라리 총을 맞아 죽는 것이 좋지.
‘
그밖에 창발성을 제고하야‘라든가, ’견결히 반대한다‘라든가, ’경각성을 높여서‘라든가, ’청소한 우리 인민공화국‘이라든가 하는 말들을 잘 쓴다.
빨갱이라는 어감이 우리들의 귀에 거슬리지 않고 들리던 때가 어제런 듯하건만, 적어도 날로 부패해가는 대한민국을 바로잡고 우맃리 민족에 희망을 던져줄 수 있는 그러한 무엇이 아닐까 하고 은근히 기대조차 품었더니...
미워질래야 미워질 수 없는, 아무리하여도 내 동생이나 조카들처럼밖에 여겨지지 않는 순진무구한 저 청년들이 다만 그릇된 지도자들을 만났음으로 말미암아 괴나리봇짐에 하잘것없는 소총 한자루와 초라한 삽 한자루씩을 들고 나가서 고도로 발달된 기계화부대와 부딪혀서 그 대포알 밥이 될 것을 생각하니 다락 위에 누워 있는 내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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