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8.15 해방과 6.25 전쟁
부제 : 격동시대 구술실록(1945~1960)
전주문화재단 2008
해방후 한국에 주둔한 미군이 조선에서는 ‘사람이 둘 모이면 당은 세 개 생긴다’ 할 정도로 사상적으로 자유분방한 시기다. 인테리가 좌익을 안 하면 무식한 사람이라고 취급받는 사회적 분위기도 감지되고, ‘조선공산당’이라는 좌익간판도 내걸고 활동하던 때다. 일제의 징용을 피해 입산한 ‘빨치산’에 대해서도 물론 우호적인 분위기다. 내남없이 고루 잘 살겠다는데 이보다 더 훌륭한 사상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순간에 사람의 선택이란 건 겉보기엔 우연히 결정되어지는 듯 보이지만 그사람이 지나온 삶의 궤적에 연장선상에서 선택되어질 수 밖에 없다. 특히 사상적인 측면에선 더욱 그러하다. 사상은 강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상을 강제하기 위해서, ‘빨갱이’ 사회주의 사상을 죽이기 위해서, 썪어 빠진 ‘미제자본주의’ 사상을 쓸어내기 위해서 해방 후 한국전쟁시기까지 모두 30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양극단보다는 경계에 놓인 이름 없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전쟁의 비극이다. 하지만 전쟁기간에도 극소수의 그들에게 부산은 여전히 술과 여자로 둘러싸인 별천지였다. 여북하면 전쟁후엔 불야성인 밤산업을 규제하기 위해 요정에서 ‘장구와 북’을 금지했겠는가?
1953년 휴전 후 전쟁의 아픔은 지금 이시각까지도 진행중이다. 당시 국방장관이 공식적인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공비를 토벌했을 뿐이라고 강변했던 거창군 신원면 일대 717명에 대한 참사는 ‘양민’학살사건이기에 진상이 규명되고 위령비가 세워지지만,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제주 4.3사건과 여순 반란사건의 단순 가담자 2,000여명은 퇴각하는 경찰에 의해 형무소 담벼락 아래서 술취한 곡괭이에 찍혀, 술취한 꽹과리소리에 비명조차 묻혀 살해되었으며, 혹은 전주농고 뒷산에서, 황방산 기슭에서 산채로 구덩이에 파 묻혔다. 이들은 ‘양민’이 아니기에 진상은 알려지지 않은 채 ‘증언’만 이어질 뿐이다.
이렇게 ‘전주의 8.15 해방과 6.25전쟁’은 1930년 전후에 태어난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 구술된, 그들이 바라보고 해석한 ‘한국현대사’다. 이제 80세 전후인 그들은 스러져 가고 있다. 특히 당시의 이야기를 오롯이 간직한 시골마을들을 지켜보면 더욱 숙연해 진다. 60~70년대까지 부락당 30여 가구였다면 현재는 그 절반인 15가구고 그마저도 절반은 독거노인들이다. 이른 새벽 멀리서 새어나오는 쪽창의 불빛을 바라보며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일어나기에는 너무 시리기에 차라리 검은 하늘을 맞이하고자 일찍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그들을, 그들의 과거를 추억한다.
<전주의 8.15 해방과 6.25 전쟁>
<미 군정시기 갤로그 도지사>
전주 미문화원 콘셑 앞(현 전주시 중앙동 가족회관앞)
<1950. 7~9월까지의 인공시절>
<최후의 빨치산 ‘망실공비 정순덕’ 1933~2004>
10대 후반의 나이에 남편 따라 조선인민유격대원으로서 입산한 후 1963년 생포된다.
22년간의 수감끝에 1985년 석방되나 이후 강제에 의한 전향서라며 북으로의 송환을 요구한다.
<전북의 향토기업 한흥물산의 로고 ‘백양’>
해방 후 전주시 교동에 설립한 한흥물산은 이후 풍요와 따뜻함을 상징하는 ‘백양’으로 로고를 맹글고
80년대까지 ‘쌍방울’과 함께 국내 내의시장을 양분한다.
당시 국내 의류시장에서 별 의문 없이 표기하던 Ⅹ, ⅩL를 거부하고,
한국인의 체형에 맞게끔 95,100 로 표기한 세계 최초의 기업이기도 하다.
현재 전북 완주군 이서면 은교리에 공장이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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