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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은 다음날(book)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문학과 지성사, 윤흥길, 1977년>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尹興吉, 1977년 <文學과 知性社>


슬픈 삶을 살아왔고 슬픈 삶을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슬픈 삶을 살아 가야만 비로소 독자를 울릴 수 있는 슬픈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독자는 슬퍼하고 싶어 문학을 읽는다. 윤흥길 작가의 아홉켤레의 구도로 남은 사내는 8개의 작은 이야기로 엮어진, 우리 주변 이웃들의 저마다의 슬픔을 어루만지고 있는 연작이다. 그들의 슬픔은 35년 전의 슬픔이었으나 지금까지도 아물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기에 오늘의 독자는 같이 슬퍼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35년 전의 성남시청 뒤편의 은행나무는 지금 이 시각에도 이른 찬바람에 마지막 남은 은행알을 떨구고 있을 것이며,  ‘보름 되게 좋아합니다, 걸핏하면 보름 안으로 해내라는 거예요.’라며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몸서리 치게 했던 행정기관의 야멸찬 통지서는 2년전 용산에서도 발급되었으며, 엊그제는 전주 남부시장의 가구거리 상인에게도 발부되었다. 융니오 몇 달 여 만에 인공이 무너졌으니 인민군가 대신 핵교에서 배운 새 노래로,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를 소리 높여 부를 수 있게끔 되었는데도 여전히 인민군가를 우렁차게 불러내는 윤뵝이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인공시절의 축음기판이 돌고 있듯이...... 또한 윤흥길은 이웃의 아픔뿐이 아니라 그들의 입을 빌려 우리사회의 병든 구조를 너무나 예리하게 진단했다. 지금의 천안함 사태, 대자본의 언론장악 행태 등은 왼갖 미사여구와 최대한 어려워 보이는 전문용어들이 춤을 추고 있어 진실 접근이 쉽지 않을 뿐더러 대중들은 기어코 둔감해져 버리고 만다. 그것은 문학이, 윤흥길이,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거짓말해도 법에 안 걸리고 무사할까?...무사허지 않은 건 거짓말 헌 쪽이 아니라 거짓말을 거짓말이라고 보는 쪽이겠지. 왜냐하면 힘을 쥔 사람의 말은 소리가 외가닥으로 나와도 여론이 될 수 있고 무력한 대중의 말은 천 가닥 만 가닥이 합쳐져도 여전히 독창으로 취급받기  때문이야. 다수를 빙자한 소수의 여론은 언제나 대중의 쏠로를 유린해 온 게 사실이거든. 이를테면 혼인을 빙자한 간음 같은...<날개 또는 手匣>


육갑 같은 건 자고로 병신들이 도맡아서 허는 법이야. 그래야 시상이 공평해지거든. 비상헌 놈들이 육갑을 해 보라구 호랑이헌테 날개까지 돋힌 꼴이어서 상감도 사기꾼이 하고 대통령도 사기꾼이 하게 되지. <그것은 칼날>


오래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곧이어 소수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의 흐름이 전개되었다. 그 흐름 속에 휩쓸리면서 각자는 그것이 어제 오늘에야 비롯된 형식이 아님을 얼른 납득했다. 대체로 追敍의 형식이란 유사 이래 운 좋게 건재해 있는 사람들이 운 나쁘게 부재중인 사람에게 운의 좋고 나쁨의 차이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가를 뒤늦게 강조해 보이는 진부한 의식의 일종인 줄을 거개의 사람들은 암암리에 깨닫고 있는 듯 했다. 자기는 못 받고 남이 받는다고 배 아파할 이유도 별로 없었다. 영웅이라는 칭호를 못 받는 걸 남이 받는다고 배 아파할 이유도 별로 없었다. 영웅이라는 칭호를 못 듣는 대신 자기에게는 피둥피둥 살아 숨쉬는 축복이 있기 때문이다. 무릇 살아 있는 자는 죽은 자나 불구자에게 대하여 너그러울 필요가 있었다...

신하사가 진술한 내용은 사그리 무시된 채였다...이제 대세는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셈이었다....

산 사람들이 즐기는 놀이를 위하여 죽은 사람이 개처럼 질질 끌려 다니는 건 도저히 용서헐 수 없는 일입니다. 우하사는 우하사인 채로 죽어야 마땅헙니다 <永靑과 深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