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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치는 일상들

내가 묻힐 자리를 맹글었다 (납골묘 파며)

세계는 넓고 할 일도 많다던 어느 회장님의 세계경영이 시대의 화두가 된 적이 있다 갈 디도 많고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벌어야겠고 많이 벌기 위해서는 많이 배워야겠고 넘보다 앞서야겠고 또 많이 돌아댕기는만큼 탄소배출도 많이 해야겠고 종체적으로 나의 심신이 역동적여야 가능한 일이다 어렸을 땐 막연하게나마 어떻게 살아야 소위 교과서적인 삶에 접근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로 고민도 많았고 도구로서의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자평헌다 비록 지금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과는 상당히 달랐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잘 못 살아왔다거나 후회하는 바는 없다 매순간순간 내가 한 선택이었으며 최선을 다해왔기 때문이요, 어제 내가 한 고민과 선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나는 이렇게 희망과 불안이라는 연무색의 구도 속이지만 총체적으로 행복하다고 잘 살아가고 있다고 되뇌고 있기 때문이다

몇 해전 경향신문에서 접한 내용인데 내가 태어난 곳에서 쭈욱 살다가 죽는 것이 최고의 웰빙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요양병원에서 시름시름 앓다가도 임종은 집에 와서 맞이하는 것도 그러한 관념의 반영일 터다

 

내가 태어난 돈지 고향집은 밭 아랫녘에 있었다 현재 거주의 흔적은 없고 전부 논으로 변했으나 집 옆 샘의 흔적은 남아있어서, 음용할 수는 없으나, 여전히 맑은 샘물이 솟고 있다 그저께 보니 용천에서 저 아래 논두렁까지 미나리가 왕성하게 자생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1901년 돈지으로 돈지에서 쭉 사시다가 1954년 밭 한켠에 조성한 묘지에 묻히셨다 이번에 기존 떼봉분을 납골당으로 재조성하면서 비석을 세웠는데 비로소 할어버지와 할머니의 생몰연도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본할머니 박공녀의 출몰년은 1914~1939년으로 아버지를 낳자마자 가셨고, 둘째 할머니 안공녀의 생몰은 1913~2003년으로 본할머니의 호적을 승계하셨다한다 얼핏 듣기로는 할머니는 세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비석에는 두 분만 새겨있다 집안 어른들게 셋째 할머니는 왜 없느냐 물으니 아예 안 계셨다는데 사실인지 은폐인지 알 길이 없다 아버지도 1939년 돈지으로 아마도 7~8년 내에는 할아버지 앞에 묻힐 것이며, 나 또한 1971년 돈지으로 40년 내에는 아버지 앞에 묻히리라

 

할아버지는 강점시기 항일운동에 재정적으로도 상당히 희사하셨다고 들었다 언젠가 돈지모임에서 40년만에 본 동창 상규가 우리집안 내력을 나보다 더 세세허게 알고 있어서 무척 놀랐었다 야 너희들 내가 농담 한마디 헐게 우수개소리로 들어바바 지금 여기 땡땡이 없지? 야 땡땡이네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네 머슴였단다 너희들 할아버지도 우리 할아버지 앞에서는 다들 어려워 했다는데 근디 성범이네 할아버지는 레벨이 달라서 우리 할아버지도 상당히 공경했었디야 학식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인덕으로나 대단헌 분이셨디야

그간 할아버지 얘기는 집안 어른들한테서만 들은 터라 그런갑다 했지 고향친구한테서 당신의 행적을 들을 줄이야, 그것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얘기허니 내 안의 할아버지가 새롭게 각인되었다 내가 항일지사의 후손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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