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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면 수침동 부락 한여름 오후 다삿시, 목하 해풍과 육풍이 교차헌다. 하늘이 청명하고 구름 또한 변화무쌍하니 급히 마음이 동한다. 하여 둘반을 끄시고 구절초 고개를 넘어 옥정호둘레를 돌아 수침동까지 쭈욱 내달린다. 오도바이는 부락입구에 세우고 갑옷도 벗어던진다. 부락을 관통하여 종석산 중턱까지 서서히 오른다. 가파른 세멘포장길 양옆으로 잡풀이 왕성허다. 부락 맨우그 라멘조 양옥 마당한켠에 단 한그루 심궈둔 복숭아나무가 분재마냥 생생하다. 16세 소녀의 볼처럼 발그레 살이 올랐다, 주인집 할머니는 처마 밑 나무의자에 앉아 멀리 옥정호를 내려다본다. 수정같은 하늘에 남색 쪽구름이 갈짓자로 춤을 춘다. 경쾌한 리듬은 데깔꼬마니마냥 옥정호수면에까지 이어진다. 마당을 지나치려는찰나 원래 잿빛인지 아니면 흙장난으로 때를 탄 건지, ..
15년 된 치자분재 들이다 연일 사바나성 날씨의 연속이다. 오후 네시 삼례오도바이 샷슈문밧긔 보도는 그야말로 워터월드다. 맹렬하게 퍼붓는가 싶더니 이내 짧게나마 구름사이로 해가 방싯거린다. “아따 냐앙 먼놈의 날씨가 이런대요, 이런 날씨를 보다니 저도 연식이 되어가는건지, 아니면 세상이 변해가는건지...” 센터와 이웃한 국제인력사무소는 다들 현장에 나가서인지 무인매대를 보는 듯 괴괴하다. “비가 와도 일은 있은게, 머 하우스도 있고, 선별장도 있고 헌게.” “인부들 하루 일당은 보통 12만원이여, 거기서 한 10% 띠고 또 기사 교통비로 한 5천원씩 띤게 실제 갖고 가는 돈은 대략 한 10만원 되아.” “열심히 허는 놈은 열심히 허고, 또 일머리가 없는 놈들도 있긴 혀.”“일 못허먼 그짝이서 연락와, 그 사람 보내지 말라고...”..
인월면 출행기, 그리고 최고의 쥬라이빙 이모션 중학생시절 지리시간에나 배웠던 전형적인 사바나날씨다. 전주에서 모래재 넘어, 진안, 장수, 번암, 사치부락을 거쳐 인월까지 달리는 두어시간동안 쏟아지는 비와 쨍한 해를 대여섯번은 교차했을 터. 특히 천천면에서 장수로 가는 길, 그리고 돌아오는 길 산서면에서 관촌으로 가는 구간에서 펼쳐지는 해와 먹구름, 음양이 맹글어내는 조화는 선계라고나 할까, 내가 달리는 도로는 해가 쨍헌데 먼산 정상에 걸터앉은 먹구름은 한층 징명하다. 가히 2002년 안휘성 황산에서 본 진경산수화이후 기억에 추가될 선경이다. 간만에 들른 남원 인월면은 마음속 해방구의 전형이다. 분명 전북인데도 억양은 전북이 아니다. 어떻게 들으면 제주도같기도 하고 또 강원도 억양같기도 하다. 경남과 접경지대다 보니 경상도사투리도 예사로 들린다. 찬찬..
장마속 일상 비가 많은 요즘이다. 아버지는 물고를 보려 매일 논두렁에 나가는데 매달 받는 급여와 아파트생활이 주는 안온함에 젖은 나는 축축하게 젖어 있는 티코의 운전석 바닥이 영 심란허다. 조수석은 멀쩡한데 운전석만 축축허다. 공교롭게도 두 대 다 그 모냥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식에 약한 티코인데 혹시 부식이 더 빠르게 진행되지나 않을까... 잠시 해가 나다가도 이내 폭우가 쏟아지니 하루라도 마를 날이 없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거라곤 차에서 내릴 때 깔판을 들춰서 세워두는 게 유일한 대책이다. 매달 받는 급여와 아파트생활이 주는 안온함에 젖은 나는 창밧긔에서 쏟아지는 빗소리가 싫지 않다 폭우와 아나로그 잡음이 현묘한 교호작용을 일으키는 7월 하순의 출근길
돈지의 속살, 동돈 부유 돈지의 속살, 동돈 부유 돈지. 느을 찾는 돈지건만 그간 오도바이로, 티코로 쭈욱쭉 지나치기 일쑤였지, 언제 한번 찬찬히 제대로 톺아본 적이 있었던가? 오늘은 근 35년만에 돈지의 속살, 동돈 골목길을 찬찬히 부유헌다. 8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돈지는 깜냥 큰 부락이었다. 78년 한해 의복국민학교에 입학한 애들은 동급생이 3반까지 있을 정도로 훈짐 넘치고 북적북적한 동네였다. 그러나 불과 15년 후 초등학교는 폐교되었고 섬진강 이주민용 집단취락지였던 한일주택은 2/3가 무너져 내렸다. 어림대중으로 10개 이상이던 김공장도 죄다 폐창고로 사그라졌다. 멀리서 본 동산도 그대로고 동돈 골목길도 경이로울 정도로 40년 전 그대로다. 달라진게 있다면 흙길이 시멘트포장으로, 나무창틀이 샷슈창틀로, 스레이트지붕이 ..
이리 역골, 송학동 일대 부유 철로와 인접한 도심지 땅은 사람은 물론이요, 각종 작물, 길고양이들도 저마다의 공간에서 창생 중이다. 하여 지적공부상의 주거지는 아니지만 경계지라고는 할 수 있다. 사람의 신진대사도 세포안과 세포밖을 구분짓는 세포막에서 더욱 활발하듯 도심을 안과 밖으로 가로짓는 철로 또한 그러하다. 이리역하면 1977. 11. 11의 이리역 폭발사고를 빼 놓을 수 없다. 아마도 당시 재건사업을 하면서 철로변 건축물들도 일제히 철거했으리라. 그 후 40여년에 걸쳐 하나둘 들어선 가옥들이 최근 지구정비사업으로 또 다시 반딧불이마냥 마지막 불빛을 명멸중이다. 목하 철거중이라 낡은 스레이트 가옥들은 죄다 폐가가 되었지만 일부는 발목 굵은 닭이 녹색 펜스위에서 홰를 치고 있고 마당 한켠에서는 토란, 가지, 호박이 왕성하게 생장 ..
선선한 아침 닭실부락 부유 팔백이는 닭실부락앞 공동우물에 대고 계곡제까지 찬찬히 걷는다. 벌써 석불로변 군데군데 산딸기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몇 개 털어넣는다. 이른 아침 공복에 몇 모금 맥주를 홀짝이는 맛 그대로 온몸에 희미한 불꽃이 인다. 계곡제는 둘레가 채 500미터도 안 되는 크기다. 저수지라기보다는 유수지나 제법 큰 둠벙이라 해도 되겠다. 계곡제 서편으로 오래된 흙집은 그대로다. 이 집을 알게 된 된지 10년은 넘었다. 첨엔 빈집인 줄 알았는데 젊은 홀아비가 왔다갔다한다는 전언이다. 집 상태로 봐서는 거주목적이라기보다는 농막쯤으로 보인다. 어느날인가는 마당에 산타모승용차가 바쳐 있기도 했다. 다행히도 오늘은 인기척이나 차도 없이 괴괴하다. 집둘레를 찬찬히 톺아본다. 초가집 그대로 지붕만 포도시 스레이트를 얹은 전형적인 6..
28년만에 찾은 태안읍 유진식당 92년 봄 일요일 어느 아침, 태안상설시장 초입을 걷던 중 발견한 유진식당. 특별할 것도 없는 건물에 특이한 메뉴도 아닌 보통 백반집이었건만 유진식당이라는 상호만은 지금까지 또렷한 건 왜일까...아마도 옆구리에 성경을 끼고 막 여닫이식 나무문을 열고 교회로 향하던 소저의 환영이 그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 유진식당에서 멀 먹은 기억도, 딱히 그 골목을 다시 찾은 적도 없었다. 오늘 잠시 태안읍내를 부여허던 중 갑자기 냉면생각에 시장통 초입에 둥지식당을 찾았다. 특별할 것 없는 건물에 오직 냉면만 파는 냉면전문점이다. 한데 자리에 앉자마자 강한 기시감이 또아리튼다. ‘머지 익숙한 이 느낌이...,, 아 그렇지 여기 어디쯤에 유진식당이 있었지.’ “저기요, 90년대 초반 여기 어디쯤에 유진식당이 ..